처음이다. 혼자이기는

  고독과 글쓰기 2023-09-28 처음이다. 혼자이기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혼자는 아니었다. 혼자라고 말한 건 혼자 있었던 것이지 혼자 산 것은 아니었다. 늘 누군가와 같이 살았다. 하지만 지금은 혼자 산다. 쉰이 넘어 홀로 있으려니 이것 참 난처하다. 익숙해 져야 겠지만 그것 또한 쉽지 않다. 늘 같이 있는 것이 습관이 된 탓일까? 태어나면 당연히 혼자가 아니다. 당연히 엄마가 있을 것이고, 운이 좋으면 아빠 형 동생 등 다른 가족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 어떤 가족도 없을 수 있다. 부부가 살 다 아이가 태어났는데, 그보다 일찌 남편이 죽고, 아이가 태어나면서 몸이 약했던 엄마가 죽을 수도 있다. 그럼 그는 정말 태어나자마자 혼자인 것이다. 만나기 쉽지 않지만 누군가는 그럴 수 있는 것이다. 다행히 나는 아니었다. 5살이 즈음에 세 살 많은 누나가 죽었다. 물론 나는 기억이 없다. 그리고 지금까지 가족들은 2년 전에 연로하여 돌아가신 부모님 외에는 모두 살아 있다. 자라며 형제들이 있었고, 학교에 다니면서 친구들이 생겼다. 성인이 되어 도시로 갔다. 하숙하면서 혼자였지만 같이 있었다. 그때 정말 혼자였다면 지금처럼 쓸쓸할까? 그러지는 않을 것 같다. 서른에 아내를 만나 결혼했고, 15년을 살았다. 아프게 아내는 암으로 먼저 하늘로 갔다. 그리고 다시 나 혼자. 하지만 두 아이가 있었고, 함께 살아왔다. 지금은 어떤가? 한 아이는 두 달 전에 혼자 살고 싶다면 집을 나갔다. 둘째도 누군가와 같이 산다면 집을 나갔다. 이젠 정말 혼자다. 방 2개. 셋이서 살 때 참 좁았다. 아이들에게 두 방을 하나씩 주고 난 거실에서 생활했다. 마땅히 짐을 넣어둘 때가 없어 쌓고 올려 좁은 공간에서 비집고 살았다. 하지만 두 아들이 떠난 지금 그 좁던 집이 너무나 넓어 무섭게 느껴진다. 옆집에 팔순을 갓 넘은 할매가 산다. 새벽부터 TV를 크게 틀어 놓고 시끄럽게 한다. 거의 매일 소음에 시달린다. 문을 닫고 사는 겨울은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지만 봄...

고양이를 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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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이를 잃다. 상실감 2023-09-28 작년 6월 11일. 그날만은 정확히 기억한다. 이삿짐을 나르는 짐차 옆 골목에서 새끼 고양이가 울고 있었다. 태어난지 보름도 되지 않아 보인다. 갓 젓을 뗀 것인지 아니면 아직 떼지 않은 것인지 모른다. 죽어가는 고양이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왔다. 결막염에 걸린 눈을 치료하기 위해 안약을 바르고, 물티슈로 털을 닦았다. 그렇게 냥이와 동거는 시작되었다. 이름은 뭉이로 짓기로 했다. 뭉이와의 인연은 그날이 처음은 아니었다. 뭉이와 만나기 일주일 전부터 새끼 고양이가 계속해서 울었다. 울고 또 울었다. 그런데 그날은 유난히 울음소리가 크게 들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밖에 나오니 골목 안쪽에서 울고 있는 뭉이를 발견했다. 집으로 데려와 박스에 넣었다. 먹을 것이 없어 마트로 달려가 고양이 우유와 새끼 사료를 사왔다. 작은 밥-물통, 작은 화장실과 모래까지 갑자기 10만 원 가까이 나갔다. 하지만 살리고 싶었다. 배가 고팠던지 아작 아작 잘 먹는다. 우유도 먹었지만 사료도 잘 먹었다. 이후로는 우유는 사지 않고 사료만 주었다. 생각 외로 아이는 잘 먹다 잘 잤다. 시간이 지나면서 결막염도 나아지고, 윤기도 나기 시작했다. 뜻밖의 고양이 집사가 되었다. 2022년 6월 11일 뭉이 2022년 6월 19일 뭉이 지독한 고독이 밀려오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나에게 밝은 햇살이 밀려왔다. 뽀송한 솜털, 젤리 발바닥, 앵앵거리는 울음소리. 때로는 잠을 깨는 짜증 섞인 울음소리. 하지만 귀엽기만 하다. 눈을 비비고 일어나 밥을 챙겨준다. 그럼 아작아작 씹어 먹고 금새 잠이 든다. 그렇게 서너달이 지났다. 고양이는 생각보다 빨리 큰다. 석달 정도가 되었을 때 완전한 성묘는 아니었지만 새끼 같지 않은 새끼였다. 뭉이는 나의 껌딱지가 되었다. 잠을 잘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책상에서 작업을 할 때 항상 곁에 있었다. 자고 있는 뭉이를 보면 가슴이 몽글몽글하다. 핏기가 감동은 코끝과 젤리는 사랑스러움 그 자체다. 여기까지는 참 좋았다....

서점을 좋아한다

  서점을 좋아한다. 책을 사든 사지 않든 서점에 자주 간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동네서점이 한다둘씩 문을 닫기 시작하더니 대부분 사라졌다. 이젠 책을 사려면 인터넷 주문을 하던지 시내 큰 서점으로 가야 한다. 서점이 사라진 이유를 누군가는 도서정가제, 누군가는 시대의 변화 등에서 찾는다. 나는 도서정가제의 영향이 크다고 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요즘 누가 책을 읽는단 말인가? 책의 시대는 지났다. 한때 책을 사서 모으는 것은 고상한 취미와 같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읽지도 않은 책을 사서 비싼 돈을 들여 고급스런 책장을 구입해 책을 전시했다. 정말 전시했다. 그곳의 책들은 단 한 번도 읽힌 적이 없다. 우연히 꺼내 본 적은 있어도 펴서 읽지는 않았다. 그래도 당시만 해도 독서는 꾀나 고상한 취미였고, 있어 보이는 지적 행위였다. 하지만 시대는 변하고 흘러 사람들은 솔직해졌다. 허울뿐인 고상한 취미를 버리고 즉흥적이고 즉각적인 영상과 쾌락을 쫓아갔다. 책의 시대가 저문 것이다. 한 때 <종이책 읽기를 권함>이란 책도 나왔지만 종이책은 커녕 디지털 책도 읽지 않는다. 그렇다고 사람들은 읽지 않을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디지털화된 인터넷 정보들과 영상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읽다. 읽는 방식이 달라진 것이다. 라디어오에서 TV로, TV에서 다시 SNS로 넘어가듯 말이다. 그래도 난 서점이 좋다. 이전처럼 미친듯이 책을 사지 않지만 말이다. 살 수도 없다. 이전에 비하면 책값이 두 배에서 세 배는 더 비싸기 때문이다. 고르고 골라 한 두 권을 구입하든지, 중고서점에 가서 책을 구입할 때가 많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전에 비하면 1/10도 되지 않는 극히 적은 몇 권의 책만을 구입한다. 서점에 가면 글감이 떠오른다. 이것도 쓰고 싶고 저것도 쓰고 싶다. 서점에 가면 좋다. 인터넷으로 보는 것보다 책을 펴서 내용을 살필 수 있다. 오감으로 느껴지는 느낌은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 없다. 출판에 종사하지 않아 정확히 책의 규격이나 용어를 알지 못하...